자전적인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한 이후, 언젠가는 꼭 사진에 대해 다뤄보고 싶었다. 처음 카메라를 가지게 된 날부터 지금까지, 사진은 내 삶에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해 왔다. 단순히 삶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사진과 함께한 순간들이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웹사이트에 사진과 함께 남긴 몇 편의 에세이들은 그런 내 삶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관련 글 : 나의 아버지, 희망 프로젝트 : 불확실한 미래에 몸부림 치던 청춘의 기억 등)
그렇게 사진과 관련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첫 주제로 그동안 내가 사용해온 카메라들을 돌아보며, 당시의 상황과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처음 카메라를 갖게 된 2003년부터 2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총 10대의 카메라를 보유했고, 그것들은 우여곡절 많았던 내 인생과 함께 시간을 기록하고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매개체가 되었다. 사진은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었고, 이제 그 인생 카메라들을 하나씩 소개해 보려 한다.
나의 첫 디지털카메라 : Sony DSC-V1

Sony Cyber-Shot DSC-V1
2003년, 소니에서 출시한 하이엔드 디지털 카메라. 524만 화소의 1/1.8” 센서를 탑재해 지금의 스마트폰 카메라와 비교하면 한참 부족한 성능이지만, 당시에는 Carl Zeiss 렌즈를 장착하고 최신 기술을 모두 집약한 첨단 디지털 카메라였다. 출시 가격도 100만 원에 육박해 고급 모델로 여겨졌다.
출시가 : 90만원 대 / 보유기간 : 약 4년
22살, 늦깎이로 대학에 입학하며 부모님께 선물받은 인생 첫 카메라였다. 지금의 아이폰보다도 작은 센서를 탑재한 이 카메라는 당시엔 최고급 하이엔드 디지털카메라로 여겨졌고, 그 사실이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당시 기준으로는 꽤 준수한 화질을 제공했기에, 2000년대 초반 싸이월드가 대세였던 시절에는 지인들의 사진을 찍어 미니홈피에 올리고 방문자 수를 늘리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사진과 카메라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지만, 그저 멋모르고 셔터를 눌렀던 순간들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모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 시절 이 카메라로 찍은 대부분의 사진이 관리 부주의로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의 허세 가득하고 풋풋했던 내 모습, 그리고 그때의 분위기를 담고 있던 사진들을 더는 꺼내볼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도 아쉽기만 하다.



나의 첫 DSLR : Sony DSC-A700

Sony DSC-A700
2007년, 소니에서 출시한 디지털 DSLR 카메라. 당시 미놀타를 인수한 소니가 자사 브랜드를 내세워 처음 선보인 야심작으로, 1,200만 화소의 크롭 센서와 손떨림 방지 기능을 탑재해 준전문가급 카메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DSLR 시장에 다소 늦게 진입한 소니가 빠르게 점유율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한, 일명 ‘효자 카메라’였다.
출시가 : 120만원 대 / 보유기간 : 약 5년
군 전역 후, 어머니께서 몰래 모아두셨던 비상금으로 큰맘 먹고 사주신 카메라였다. 복학 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힘겨운 시기를 보내던 내게, 이 카메라는 사진이라는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이게 해준 특별한 기기였다. 일반 디지털카메라와는 차원이 다른 뛰어난 광학 성능과 손에 느껴지는 촬영의 감각 덕분에, 제법 많은 곳을 누비며 다양한 장면들을 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대학교 필수 교양 과목이었던 ‘사진 스튜디오’ 수업도 이 카메라로 수강했다. 덕분에 단순히 오토 모드로 셔터만 누르던 습관에서 벗어나, 사진의 기본 개념과 촬영 기술을 익히며 한층 깊이 있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전시회나 개인 프로젝트를 통해 사진을 보다 진지하게 다루는 기회도 있었지만, 가난한 대학생에게 고가의 카메라는 오래 곁에 둘 수 없는 사치였다.
결국 아쉬움을 뒤로한 채 카메라를 떠나보냈고, 그 돈은 막 첫 연애를 시작한 청춘의 데이트 비용으로 소중히 쓰였다. 다행히 그 시절의 여자친구가 지금의 아내와 다르지 않으니, 생각해보면 그리 손해 본 선택은 아니었던 셈이다.







가난한 시절의 동반자 : Sony SLT-A57

Sony SLT-A57
2012년에 출시된 이 카메라는 DSLR과 미러리스를 잇는 과도기적 제품이다. 기존 DSLR의 반사 거울을 반투명 거울로 대체해 연사 속도와 AF 검출 성능을 향상시켰지만, 이후 반사 거울을 완전히 제거한 미러리스 카메라들이 더 작고 뛰어난 성능으로 등장하면서 결국 시장에서 사라진 비운의 모델이 되었다.
출시가 : 60만원 대 / 보유기간 : 약 2년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을 1년 만에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려던 무렵, 제품 촬영용 카메라가 필요했지만 당시 경제 사정으로는 좋은 장비는 사치에 불과했다. 다행히도 소니는 그 시절 ‘바디 공장’이라는 별명답게 DSLT라는 과도기적 모델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쏟아내고 있었고, 덕분에 100만 원도 채 되지 않는 금액으로 A57 바디와 번들 렌즈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전까지 사용하던 A700보다는 하위 모델이었지만, 신제품답게 성능 면에서는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셔터를 눌러야 했던 그 시절의 사진을 다시 들춰보면 어딘가 모르게 애잔한 감정이 스며든다. 가성비 보급기였던 이 카메라는, 어쩌면 사업의 시작점에서 아직 미숙하고 불안정했던 내 모습을 닮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소니의 DSLT 라인업은 오래가지 못했고, 비슷한 시기 나의 첫 사업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이 카메라는 지금까지도 내 암울했던 시절을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게 해주는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기록에 집중하다 : Sony RX100 M3

Sony Cyber-Shot RX100M3
2014년에 출시된 하이엔드 디지털 카메라로, 2천만 화소의 고화질 1인치 센서에 광학식 손떨림 방지 기능과 칼자이스 렌즈를 탑재한 제품이다. 컴팩트한 사이즈까지 갖추고 있어 사진 품질과 휴대성을 모두 만족시켰다. 출시된 지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완성도가 높은 카메라다.
출시가 : 90만원 대 / 보유기간 : 약 3년
사업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전향하면서 작업물을 기록할 목적으로 들인 카메라가 바로 RX100M3였다. 컴팩트한 크기와 준수한 화질 덕분에 부담 없이 가볍게 툭툭 찍을 수 있었고, 차도 없이 업무로 이곳저곳을 오가야 했던 당시의 나에게는 그야말로 최적의 카메라였다.
늘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며 예상치 못한 순간들을 포착해 기록하는 일이 점점 일상이 되었고, 그렇게 쌓인 사진들은 오히려 작업에 큰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었다. ‘사진은 기록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가장 체감하게 해준, 고마운 카메라였다.
특히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본 미야자키 여행과 다낭 신혼여행도 이 카메라와 함께였다. 무일푼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 조금씩 경제적 안정을 되찾고, 결국 결혼에 이르기까지—인생의 가장 극적이었던 시기를 함께한 카메라이기에 더욱 각별하게 기억된다.







나의 첫 풀프레임 카메라 : Sony A7M2

Sony A7M2
2014년 소니에서 출시한 렌즈교환식 풀프레임 디지털 카메라. 2430만 화소의 풀프레임 센서에 손떨림 방지 기능까지 탑재하여 출시 당시 일반 사용자와 전문가를 모두 만족시켰던 카메라다. 단종된 현재까지도 입문 카메라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가성비 좋은 카메라로 알려져 있다.
출시가 : 150만원 대 / 보유기간 : 약 1년
부피가 크고 무거운 카메라를 고집하게 되는 이유는 결국 ‘사진 품질’에 대한 욕심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사진을 조금 더 진지하게 다루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면서, 언젠가부터는 기록물의 ‘질’에 점점 집착하게 되었고, 그런 갈증 끝에 처음 들이게 된 풀프레임 카메라가 소니 A7M2였다.
개인적인 욕구뿐 아니라, 당시 진행하던 프로젝트들에서 고품질 이미지가 요구되는 경우가 잦았기에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된 장비였다. 확실히 큰 판형에서 오는 깊이감과 디테일은 만족스러웠고, 결과물만 놓고 보면 충분히 값어치를 해주는 카메라였다.
하지만 무게와 크기에서 오는 부담감은 생각보다 컸다.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들고 나가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고, 그러다 보니 일상 속 사진은 서서히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나에게는 맞지 않는 카메라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때마침 프로젝트가 종료되면서 구매한 지 딱 1년 만에 처분하게 되었다.
보유 기간은 짧았지만, 장인, 장모님과 함께 했던 도쿄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만큼은 지금도 매우 만족스럽게 남아 있다. 짧지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런 카메라였다.






카메라로 보는 세상
이번에 소개한 다섯 대의 카메라는, 사진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시절부터 사진을 ‘기록’과 ‘표현’의 매체로 받아들이기까지, 나의 성장과 변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카메라를 통해 기록하는 경험은 눈으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감각이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의도’가 담긴 기록이라는 점이다.
같은 장소, 같은 장면이라 해도, 카메라로 담긴 세상은 언제나 내가 보고 싶은 방향으로 조금씩 다르게 표현된다. 이 미묘한 차이를 인식하게 된 순간부터, 나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는, 본격적으로 사진이 취미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의 카메라들을 중심으로, 그 당시의 생각과 경험을 실제 촬영한 사진들과 함께 정리해보려 한다.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