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자동차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공의 결과물이자 부의 기준이 되기도 하며, 소유자의 외적 이미지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런 표면적 가치를 드러내고 추구하는 것은 다소 천박해 보일지 몰라도 자본주의 세상에 살면서 이에 완전히 초연해지기란 쉽지 않다.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뚜벅이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는 도심에서는 차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을뿐더러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사업 초기에는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업 2년 차에 그런 큰 부담을 지면서까지 무리해서 자동차를 덜컥 계약해버린 계기가 있었다.
외주 일을 하다 보면 고객사를 찾아다니며 미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 대부분은 도심의 대중교통으로 이동이 가능한 위치에 있지만 공장이나 물류창고 같은 일부 업종의 경우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지역 변두리에 있는 경우도 제법 있다. 그날도 신규 고객사가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제조업체였는데 버스 정류장에서 도보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택시를 타기에는 애매한 거리이고 정거장 주변이 논밭이라 잡기도 쉽지 않아 스마트폰 지도를 보면서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를 걸어오셨어요?” 초봄의 날씨에도 땀에 흠뻑 젖은 날 못마땅한 눈으로 훑어보며 담당자가 건넨 첫 마디였다. 그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찾아간 미팅에서 담당자는 내내 불신 가득한 태도로 일관했고 결국 찾아간 보람도 없이 불발되고 말았다. 이런 결과가 단순히 차가 없이 온 내 모습 때문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담당자 눈에는 천만 원이 넘는 계약을 하러 오는 스튜디오 대표가 차도 없이 먼 거리를 걸어온 행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을 것은 자명했다. 그 일로 난 자격지심이 폭발했고 자동차가 먹고 사는 일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곧바로 자동차 전시장을 찾았다.
미니쿠퍼는 대학시절 나의 꿈과 같은 차였다. 유복했던 한 선배가 이 빨강색의 작고 유려한 디자인의 차를 타고 미술관 앞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국산차, 경차 등 합리적인 선택지가 많았지만 당시의 나는 다른 차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첫 번째 찾아간 BMW미니 영업소에서 시승조차 하지 않고 덜컥 계약을 하고 말았다. 1세대에 빨강색은 아니었지만 미니의 헤리티지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회색빛의 3세대 미니였다. 출고일을 기다리며 천진난만하게 계약서를 들고 있는 나를 보며 자동차가 무슨 장난감 쇼핑인 줄 아냐며 어이없게 바라보던 구 여자친구, 현 아내의 표정이 기억난다.
그때부터 나의 이중적 삶이 시작되었다. 겉으로는 꽤 괜찮게 성장한 자영업자로 보이길 원했지만 이면에는 월 할부금을 갚기 위해 쉼 없이 일하는 내가 있었다. 차가 있으니 소비도 늘어났다. 세금, 보험, 기름값 등 월 유지비는 기본이고 이동 거리가 멀어지면서 그에 따른 추가 지출이 동반되었다. 물론 그로 인해 인생이 조금 더 스펙타클해지고 경험의 질도 높아졌지만 매월 카드 고지서를 받을 때마다 분에 맞지 않는 소비를 했다는 부담감이 나를 압박했다. 더 큰 문제는 할부금을 다 갚아 나갈 때쯤 되니 새로운 차를 고민하는 나에게 있었다. 이미 차는 나에게 이동수단으로서의 도구가 아닌 나의 사회적 지위를 포장해주는 껍데기로 변질되어 있었다.
더 이상 차로 인해 제약받는 삶을 살아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감히 차를 처분할까도 생각했지만 결혼 직후 멀어진 사무실로 인해 아예 없애기는 쉽지 않았다. 유지하는 대신 더 이상 차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부터 할부금을 모두 떨쳐낸 나의 첫 차는 이동 수단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했다. 작고 연비도 좋아 부담도 덜했다. 그렇게 몇 년을 더 타고 다니다가 아이가 생기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뒷좌석이 매우 좁고 문이 없는 3도어의 미니쿠퍼는 패밀리카로서는 빵점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이라도 데려갈 때면 앞 좌석을 모두 젖히고 몸을 구겨 넣어 아이를 앉혀야 했다. 그마저도 부피가 큰 카시트 때문에 앞좌석을 최대한 당겨 놓아야 가능했다. 많은 아빠들이 그렇게 카니발 인생을 시작하는 건가 생각이 들 때쯤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장인어른이 오랫동안 타던 본인의 지프 랭글러를 가져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주셨던 것. 나이를 먹으니 몸집이 큰 차는 부담 된다며 전원주택에서 살게 되면 필요할 거라고 미니를 내놓고 가져 가라고하셨다. 내 작고 소중한 미니는 그 집의 처남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차였다. 장인어른의 랭글러는 연식이 꽤나 되었지만 그분 특유의 꼼꼼한 성격 덕분에 관리가 제법 잘 되어 있었다. 몸집으로 보나 가격으로 보나 남는 장사였다. 그 제안을 받은 직후부터 차에 대해 초탈하던 나는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내 안의 오프로드 감성이 어느새 불타오르고 있었다. 예의상 몇 차례 거절하는 척하다가 결국 못이긴 척 바꿔 온 지 어느덧 3년이 지났다.
이미 10년이 훌쩍 지나버린 랭글러는 조금씩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공식 서비스 센터를 찾아갔다가 엄청난 수리비 청구서를 받아 보고 혀를 내둘렀으나 랭글러는 그렇게 신사적으로 고쳐타는 차는 아니었다. 각종 동호회나 커뮤니티에서 경정비 및 소모품 교체는 스스로 하는 법을 배웠다. 그곳의 거친 형님들이 생각보다 친절하고 세심해서 놀라웠던 기억이 있다. 덕분에 이제는 각종 전구류나 배터리, 연료필터, 브레이크 패드 등은 스스로 교환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게 고쳐가며 차에 대한 애정도 조금씩 쌓여갔다.
그렇게 나의 40대를 함께 하고 있는 오래된 랭글러는 나의 인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잘 포장된 도심의 길을 선호하던 나를 거친 험로로 이끌어 자연과 더 가까워지게 해 주었고,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는 듬직한 공간은 집돌이었던 나를 가족과 함께 캠핑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언젠가부터 차를 사치와 허영의 자산으로 치부했던 내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물론 차가 내 인생을 대변해 줄 수 없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하지만 인생의 기준이 명확하고 그 방향성과 맞는 차와 함께 한다면 인생을 더 풍요롭고 가치있게 살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얼마 전, 11월에는 이례적으로 엄청난 눈이 내렸다. 새벽부터 내린 폭설로 아내는 딸을 유치원에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난 우리의 랭글러를 믿고 천천히 가보자고 했다. 다행히 우리 가족의 믿음직한 패밀리카는 눈길을 안정적으로 헤치고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도착한 유치원에는 많은 아이들이 등원을 포기해 선생님과 몇몇 친구들만 있었다. 딸은 그날 선생님과 오붓하게 마당에서 눈사람을 만들었다며 즐거웠던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그래 딸아, 그렇게 포기하지 않는 근성으로 의미 있는 일상을 만드는 거란다. 랭글러는 어느새 우리 가족의 삶에도 이미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
언제까지 이 차와 함께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장인어른께는 앞으로 10년은 족히 더 탈 수 있을 거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사실 수리비 고지서를 받을 때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껴 고민이 깊어질 때가 많다. 하지만 나의 인생에 있어서 이미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이 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그 이상의 가치를 하고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이 차가 버텨주는 만큼 나도 지치지 않고 열심히 다니며 멋지고 좋은 장소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고 다짐해 보았다. 소소한 고장이 있고 행동은 느리지만 절대 퍼지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묵직함이 느껴지는 이 오래된 차처럼 나도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