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별오름 정상에서. Jeju, Republic of Korea. (2018)
새별오름 정상에서. Jeju, Republic of Korea. (2018)

늦가을 제주 여행

가을의 정취와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결혼 1주년 기념 제주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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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지나고 나면 참 빠르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결혼식을 올린 그 화창한 가을이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벌써 그 다음해 가을이 되었다. 특별한 기념식을 하진 않기로 했지만 첫 결혼 기념일은 어떤 의미로든 기억에 남길 수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떠났다. 늘 함께 가고 싶었던 제주로.

제주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반겨주는 건 역시 해안도로를 따라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였다.

이번 여행은 호화로움 보다는 소박하지만 많이 걸으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장소 위주로 동선을 정했다. 럭셔리한 숙소나 고급진 레스토랑의 화려함을 누리진 않았지만 아무렴 어떠냐고 생각했다. 제주는 발 닿는 곳 어디든 여행의 로망을 실현시켜주는 멋진 곳이니깐.

곳곳의 억새풀이 제주의 가을을 실감케 해주었다.

핫하다는 애월이나 제주 시내 쪽보다 한적한 남쪽 동선이 좋았다. 제주까지 와서 북적거리는 인파들 속에 섞여 있기는 싫었다. 늦가을 정취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 마냥 걸어도 아무런 눈치를 볼 필요 없는 곳을 찾았다. 첫번째 목적지는 송악산 둘레길이었다.

송악산 둘레길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바다와 멀리 보이는 산방산의 전경

송악산 둘레길은 제주의 숲과 바다를 동시에 즐기며 산책할 수 있는 곳이다. 적당히 선선한 날씨에 인적 드문 오후의 송악산 산책은 제주 첫 여행지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해주었다.

느즈막한 오후에는 새별오름을 방문했다.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 많은 인파를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 시간대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새별오름의 억새밭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다음날 아침, 첫 방문지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었다. 결혼 전 부터 제주를 방문할 때 마다 한번씩은 꼭 들리는 곳 이었다. 제주의 경이로움에 빠져 평생을 머물며 작품활동을 했던 김영갑 작가가 남긴 제주의 사진들을 보면 마치 그 곳에 내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입구

두모악은 서귀포시 한적한 곳에 위치하여 특별한 행사가 없는 평일에는 방문객이 많지 않은 편이다. 덕분에 폐교를 리모델링한 갤러리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넓은 잔디마당과 나무들이 있는 갤러리 뒷마당에서 잠시 쉬기 좋다.

갤러리 내부는 사진 촬영은 가능하지만 굳이 찍지는 않았다. 그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상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김영갑 작가가 가장 사랑한 용눈이 오름을 이번 여행에서 빼놓은 것이 아쉬웠다. 다음 여행에는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안도로로 이동 중 잠시 내려 찍은 사진

다음 목적지인 우도로 향했다. 우도가 핫플레이스가 된 후로 이미 그 곳을 점령 해버린 갖가지 컨셉의 카페를 차치하고라도 우도는 아직도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는 트래킹 코스이다. 마음 같아서는 걸어서 한바퀴를 돌고 싶었지만 예정된 배시간 때문에 아쉽지만 전기 스쿠터를 대여해 한바퀴 돌기로 했다.

카페보다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서 마시는 커피가 더 좋았다.

개인적으로 우도의 가장 큰 매력을 느꼈던 곳은 가장 높은 곳에서 주변을 전망할 수 있는 우도봉이다. 완만하게 올라갈 수 있는 언덕길 주변으로 펼쳐진 초원과 어우러진 바다의 풍경은 답답했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줄만 했다.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방문지는 사려니 숲길이었다. 대자연림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자 웨딩 촬영의 성지 중 한 곳이다. 도착하니 역시 숲길 초입에서 꽤나 많은 커플들이 웨딩 촬영을 하고 있지만 숲길을 좀 더 들어가자 인파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여유롭게 트래킹을 할 수 있었다.

사려니 숲길 초입 빼곡한 나무들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황홀했다

우린 약 5시간의 트래킹 코스를 선택했다. 천천히 걸으며 평소 잊고 살았던 자연 그대로의 냄새를 한껏 맡아볼 수 있음이 행복했다. 적당히 차오르는 숨은 그동안 몸속에 있던 노폐물을 배출하고 신선한 공기로 채우는 정화작용 같이 느껴졌다.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내가 생각했던 제주의 관념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 제주의 매력은 관광지로서 발전하고 새로워지는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고 숱한 세월을 견뎌내며 지나온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있었다.

아내와 제주살이를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더 이상 그 고민을 하지 않기로 했다. 제주란 곳은 단순히 삶의 터전을 옮긴다고 해서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오히려 좋아하던 곳을 파괴하는데 일조할 뿐이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

그냥 생각날 때마다 한번씩 찾아와 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제주는 그렇게 다음 여행까지 온전한 모습으로 우릴 기다려줄 것이라 믿으며 다시 방문했을 때, 언제나 처럼 변함 없는 모습으로 반겨주길 바래본다.

ROVEWORKS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1인 사업가이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생각을 전달하는 일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일 잘하는 일은 아무것도 안하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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