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이전 90년대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열심히만 하면 어느 정도 중산층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던 기회가 주어졌던 시절로 기억한다. 빠른 경제 발전과 더불어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쳐 흐르던 시대였고 가부장적 의식이 만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수성가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가장들이 존중받을 수 있던 시대였다. 우리 아버지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혈혈단신으로 상경하여 어머니와 살림을 차린 후 첫 발을 내디딘 곳이 서울 변두리의 신월동이라는 곳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다. 사정이야 다 다르겠지만 내 나이대에 평범한 경제 수준의 가정이라면 아마도 비슷한 경험이 많았을 것이다. 단칸방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큰 집으로 옮겨가는 시간은 당시 우리나라의 빠른 경제 발전 속도와 맞물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전세 계약이 만료되는 1년 단위로 10년이라는 시간을 이사를 다녀야 했다. 다행이었던 점은 같은 동네에서 주거지만 옮겨 다녔기에 전학을 가거나 친했던 친구와 이별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




나의 유년기를 보냈던 신월동은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던 동네였다. 90년대 당시 서울의 부동산 개발 붐에도 불구하고 김포국제공항과 인접한 고도 제한으로 인해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거기에 비행기 소음으로 인한 평가 절하로 아파트가 우후죽순으로 세워지던 서울의 핵심 지역과는 다르게 개발이 더디게 진행되었고 재개발 사업도 난항을 겪었다. 지금도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 70-80년대 지어진 다세대 주택들이 온전히 남아있는 모습을 볼 수있어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30년 만에 찾은 이곳에서 내가 살던 집들을 다시 찾아가 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무 연고도 없는 신월동을 다시 찾게 된 계기는 다소 우스꽝스러웠다. 얼마 전 네이버 지도로 서울의 거래처 위치를 찾다가 어딘가 익숙한 거리의 모습이 거리뷰로 보였다. 결과적으로는 주소 입력을 잘못해 관계없는 장소를 보게 된 거였는데 그곳이 내가 살던 신월동이었다. 우연히 기억 속에 완전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동네를 다시 보게 된 난 추억 속으로 갑자기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한동안 거리뷰를 따라 클릭하며 나의 어린 시절 발자취를 따라가 보다 직접 가고 싶다는 마음에 내친김에 카메라를 챙겨 들고 그곳으로 향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가 있었던 시장 근처에 주차를 하고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목적 없이 걷기 시작했다. 굳이 지도는 찾아보지 않았고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몸이 기억하는 길을 따라갔다. 놀랍게도 등굣길과 친구들과 놀던 놀이터, 부모님 몰래 찾아다녔던 오락실이 있던 곳, 무서운 형들에게 돈을 뺐겼던 골목 어귀 등은 기억의 발자취를 통해 자연스럽게 걸어서 도달할 수 있었다. 아직도 그 흔적이 진하게 남은 이곳이 신기하면서도 반가웠다. 온전히 남아있는 그 시절의 거리를 다시 마주하는 것은 그곳에 있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꺼내 보는 것과 같았다.

이날 내가 걸은 걸음은 만오천보, 거리로는 약 12km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걷는 와중에 여러 시선들이 느껴지기도 했다. 관광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큰 가방을 메고 히죽거리며 여기저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아저씨의 모습이 마치 공항에서 버스를 잘못 타고 내린 중국인 관광객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눈이 마주친 아주머니께 한국어로 길을 묻자 흠칫 놀랐던 걸 떠올리면 분명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렴 어떠한가, 그날의 나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으니. 낙후되어 버린 동네가 누군가에게는 큰 감동과 영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 전혀 공감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긴 시간 추억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가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 될 무렵, 다시 주차해 놓은 차가 있던 곳으로 가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곳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분명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이미 많은 괴리가 존재하며 이곳을 벗어나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과거의 흔적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떠나면서 흘려두었던 내 인생의 조각들이 아직까지 희미하게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사를 간 후부터 관계가 많이 소원해졌지만 함께 아침 운동을 하고 동네 목욕탕에 갔던 아버지와의 추억, 특별한 날에 한 번씩 갔던 동네 경양식집에서의 가족 외식, 장을 보러 갈때면 혹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꼭 따라나섰던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어머니. 그 기억의 편린들이 외려 지금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언젠가는 다시 찾아 줄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말이다.


나는 오랜 시간 그 기억을 잃어버리고 살아왔다. 분명 그 이면에는 많은 우여곡절의 시기를 겪으며 새로운 환경과 변화에 자연스럽게 적응해버린 부분도 있었겠지만 어린 시절의 어리숙했던 자아를 다시 대면할 용기가 부족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늦었지만 그 발자취가 남은 장소에 직접 발을 내딛고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니 다행히 공허했던 내면의 한구석이 다시 채워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 과거를 회상하며 희미하지만 어린 시절의 소중했던 추억을 다시금 찾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그 시절의 추억이 깃든 장소는 그 기억을 찾기 위한 보물지도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 신월동이 그런 곳이었다. 짧았지만 의미있는 방문이었다.

여담이지만 신월동에서의 지긋지긋한 전세살이를 벗어날 무렵, 당시 아버지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신월동과 가까웠던 목동의 20평대 구축 아파트를 계약하느냐 아니면 경기도 김포에 새로 지어지던 40평대 신축 아파트를 분양받아 더 쾌적한 주거 환경을 영위하느냐였다. 아버지는 후자를 선택했다. 지금 생각하면 천추의 한이 될 수도 있는 어리석은 선택으로 보이지만 아버지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 아파트는 10년 넘게 전세를 전전하던 우리 가족이 이사를 갈 필요가 없게 된 첫 집이자 아버지 인생 최대의 성공을 대변하는 결과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 선택이 요즘 말로 이른바 벼락 거지라 일컬어지는 가정의 표본이 되었을지언정 인생의 행복과 부동산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기에 난 지금도 그 선택을 존중한다.
당시 가족에게 좀 더 넓고 편안한 주거환경을 선물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온전히 남아 지금 나의 아이가 마음껏 뛰놀며 자연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기억을 아주 약간은 공유하고 있는 자로서 심히 끄떡거리며 정독했습니다. 저도 어린시절 살았던 부평이 어느날 몸시 궁금해져 스무살 언저리쯤 갑작스레 방문했던 적이 있는데, 옆집에 살던 할머님이 어린시절 기억 그대로 나타나셔서 당혹스러우면서도 신선했던 기억이 있어요. 어릴때도 할머니였는데 지금도 할머니라니 불로장생이신가 싶었던…….. 한국말을 잘 하시는군요 ㅎ. 같이 추억여행을 한 기분이라 즐거웠습니다.
가끔은 어린시절의 기억을 온전히 그리워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철이 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전 많이 늦었지만요. 그 시절의 기억을 공유하는 이에게 듣는 답글이라 더욱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한국말은 아직도 어렵게 느껴집니다. 항상 좋은 날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