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해 다들 그리곤 better not cry
어느 때보다 춥고 시린 겨울이다. 경기는 바닥이고 국가적 혼란으로 인해 기대하던 연말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던 광장에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적인 삶을 잃을 뻔한 성난 사람들의 에너지로 들끓었고 그 와중에도 수습은 커녕 자신의 죄를 덮어줄 희생양을 찾으면서 끝까지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는 배부른 자들의 추잡한 모습들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오래전 즐겨 듣던 노래가 떠올랐다. 공개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마치 작금의 상황을 예언이라도 한 듯, 가사의 모든 부분이 지금과 들어맞는 서태지의 ‘크리스말로윈(Christmalo.win)이다.
서태지는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대중 가수였다. 데뷔곡 ‘난 알아요’를 카세트 테이프로 듣던 것이 국민학교 3학년 때였으니 나의 성장의 시기와 맞물려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은 분명했다. 특히 소심했던 성격 탓에 자신 있게 생각을 내뱉지 못했던 나에게는 서태지의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음악들은 큰 영감이 되었다. 성장기에 겪고 있던 욕구 불만에 대한 해소와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부조리를 깨부수는 것 같은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 주었다. ‘교실이데아’를 들으면서 당시 억압적인 교육 환경에 분노했고, ‘컴백홈’을 들으며 그 분노가 비행(非行)으로 변질되지 않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발해를 꿈꾸며’를 들으며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던 분단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었다.
꽤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가 2014년에 내놓은 서태지의 신곡 ‘크리스말로윈(Christmalo.win)이 선보였을 당시 많이 변해버린 음반 시장과 수요층으로 인해 문화 대통령으로 불리던 기존의 명성에 비해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기괴한 멜로디와 분위기 때문에 호불호가 많이 갈리기도 했지만 당시 음악에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담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던 분위기 또한 적잖이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해 일어난 큰 사건을 필두로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경색되어 있었다. 그리고 훗날, 당시 정부가 주도한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가 공개되면서 다양한 목소리가 전해지지 않았던 이유가 밝혀지기도 했다. 때문인지 몰라도 스스로 입을 닫고 자중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던 그 시기는 나의 어린 시절과는 사뭇 달랐다.
울지마 아이야. 애초부터 네 몫은 없었어. 아직 산타를 믿니?
나 역시 그랬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인간이 가져야 할 보편적 감정보다 내가 처한 주변의 상황을 신경 쓰곤 했다. 불편한 상황에서는 절대 앞장서지 않았고 그저 거대한 담론에 편승하며 기성세대로서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었다. 그 사이 우리의 미래 세대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고, 2년 전 이태원 참사 또한 그러했다. 변화의 기적을 바랐지만 그 실낱같은 희망마저 기성세대의 무책임한 모습으로 인해 심해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비극적 희생이었다. 우리 사회는 첩첩이 쌓여진 공공의 트라우마에 휩싸였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무기력했던 스스로에겐 부채의식이 남았지만 이 역시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애꿎은 마녀를 포획한 새빨간 크리스마스 와인
2024년. 지금 또한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고 추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어쩌면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비극은 기성세대가 파놓은 함정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류의 역사적 비극은 자연적으로 벌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인간 세상에서 이득을 취하려는 집단의 힘이 강해지면 그로 인해 생기는 반작용의 에너지가 착취와 희생으로 발현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런 듯하다. 10년 전과 비교해도 전혀 변하지 않는 지금의 상황은 할로윈 마녀의 피로 만든 와인을 마시며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는 기름진 산타가 주인공인 이 노래의 가사와도 닮아 있다.
널 위한 기적이 어여 오길 이 마을에
다행히도 우리는 잘못을 바로잡아 왔다. 선과 악이 치열하게 공존하면서도 대의는 선의 방향에 좀 더 가까웠고 그 누적된 선택들이 지금까지 인류가 자멸하지 않고 버텨온 원동력이었다. 변화는 위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배부른 자들의 간사하고 음흉한 속성 때문이다. 또다시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이르러 물결은 다시 아래로부터 일어날 것이며 그 물결이 거센 파도가 되어 단단히 굳어 척박해진 대지를 뒤엎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움직임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일컫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난 그 기적의 물결을 두려워하는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건 아니었는지 반성해 본다. 다시 그들의 편에 서야 할 것이다. 미래의 희망은 결코 가진 자에게 있지 않으며, 배부른 산타가 주는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