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새로운 구성원의 탄생은 지난 추석 명절 연휴를 맞아 모처럼의 저녁 외식을 위해 집을 나서기 직전, 갑자기 아내의 양수가 터지면서 시작되었다. 열 달 가까이 기꺼이 품어온 시간이 무색하게도 뱃속의 아이는 우리에게 마지막 만찬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 가족의 오붓한 시간을 시샘한 듯, 뱃속의 아이는 예정일보다 일주일이나 앞서 출산의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여유로운 연휴의 저녁식사 계획은 그렇게 무산되었고 부랴부랴 짐을 챙겨 식당이 아닌 산부인과로 향했다. 평소 좋아하던 삼겹살집에서의 만찬을 기대하던 여섯 살 첫째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의외로 딸은 조금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괜찮아, 엄마. 다 잘 될거야”
산부인과로 향하는 차 안 뒷좌석에서 여섯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위로의 말이, 침착해야 했음에도 외려 당황해서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아빠를 부끄럽게 했다. 고작 육 년을 살아온 아이가 불혹을 넘긴 부모를 다독이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실소가 터졌다. 불안해하며 산만한 배를 움켜잡고 있는 아내와 연휴라 꽉 막혀 있는 길을 번갈아 보며 전전긍긍하면서도 뒷좌석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딸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불안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렇게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고, 야간 당직을 서던 간호사는 아내의 상태를 보더니 곧 아이가 나올 것 같다고 했다.

분만실에는 보호자를 제외한 가족들의 출입이 통제되어 딸과 함께 있을 수 없었기에 처갓집 부모님께 연락하여 딸을 맡기기로 했다. 다행히 연락과 동시에 출발하신 덕에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 만나 딸을 넘겨 드릴 수 있었다. 이별 직전까지 나에게 밝은 표정을 보여주며 의연한 모습으로 동생 태어나면 다시 만나자고 말하는 딸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어리게만 봐서 훌쩍 커버린 아이의 내면을 몰랐던 건지 아니면 곧 태어날 동생 때문에 애써 어른스러운 태를 억지로 내는 건지 단번에 파악하기 어려웠다. 무엇이 되었든 그런 딸이 안쓰럽고 애잔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부모와 떨어져 며칠을 지내야 하는 딸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분만실로 급히 올라갔다. 아내는 벌써 진통을 시작하고 있었다. 딸과 함께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혼자 진통을 겪는 것이 무서웠다던 아내는 나를 보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난 아내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진통의 강도는 빠르게 심해지고 있는 듯 보였다. 머지않아 당직 의사가 분만실로 들어와 아내의 상태를 살피더니 차분하고 안정된 톤으로 아내에게 말했다.

“음, 빨리 낳는 게 좋겠죠? 지금부터 나랑 같이 힘 몇 번 주고 얼른 낳읍시다.”
출산이 그렇게 마음먹으면 쉽게 되는 거였던가? 그동안 알고 있던 나의 상식을 깨뜨려 버릴만한 의사의 거침없는 태도가 살짝 불안하면서도 묘하게 믿음직스러웠다. 그때부터 아내는 의사가 지시하는 타이밍에 맞추어 힘을 주기 시작했고, 십분 여가 지났을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간호사가 위생복을 입혀주며 빨리 탯줄을 자르러 들어가라 했다. 이게 정말 이렇게 되는 거라고? 입원 수속과 동시에 일사천리로 진행된 출산의 과정이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시계를 보니 병원에 도착한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후처리를 하고 걸어 나오는 의사의 모습 뒤로 후광이 비쳤다.



그렇게 10개월에 걸친 임신의 대장정이 마무리되었다. 첫째 때와는 다르게 둘째의 임신 기간은 생각보다 길고 힘겹게 느껴졌다. 아내도 적은 나이는 아닌 데다가 아직 여섯 살에 불과한 첫째 딸을 케어하며 임신을 감당하기에는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임신 초기에는 첫째 때 안 하던 입덧도 심했고, 말기에는 여기저기 통증도 호소했다. 물론 그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 나 또한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임산부가 겪는 부침에 비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나는 빨리 출산으로 귀결되기를 바랐다. 비록 출산과 동시에 육아의 고됨이 시작될지언정, 내 몸이 내 것이 아닌듯한 고통에서 하루빨리 해방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육아는 분담할 수 있지만, 임신과 출산은 그럴 수가 없는 답답함도 컸다. 그러니 수월했던 출산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인가.
출산 후, 아내와 나는 병실에서 2박 3일을 함께 보냈다. 첫째는 외할머니 댁에서 지내고 있고 아기는 신생아실에서 돌봐주고 있었기에 아내와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오붓하고도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침대에 누워 몸을 회복하고 있는 아내를 가만히 바라보니 경외심이 느껴졌다. 난 아내에게 아는 모든 주변 사람을 통틀어도 더할 나위 없는 출산의 여왕이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아내는 차분하고도 덤덤했다. 출산의 고통을 대신 느낄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고 말했던 스스로가 매우 가볍게 느껴질 정도였다. 첫째 때도 그랬지만 둘째를 갖게 되기까지 나의 바람이 매우 크게 작용했음에도 아내는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고통을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감내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깊이 무언가가 복받쳐 올랐다.

그렇게 비록 5평 정도의 좁은 병실이었지만, 오랜만에 갖는 둘만의 시간은 퇴원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소중하게 느껴졌다. 산후조리는 집에서 직접 하기로 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조리원 입소를 거부한 아내는 집에서 누군가 일해주는 것이 불편할 것 같다며 미리 예약한 산후도우미 마저 취소했다. 고민 끝에 산후조리는 내가 직접 해주기로 했다. 재택 근무자라 집 밖에 나갈 일이 별로 없기도 하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근 일도 많이 줄어 그 시간을 오롯이 아내에게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신 때도 남편 태교가 최고라고 말해주던 아내였기에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소식을 양가 부모님께 알리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시더니 ‘너희들 고집을 어떻게 꺾겠니’라는 표정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생하라고 말씀하실 뿐이었다.
이제 병원을 나서 이 새롭고 작은 가족을 데리고 함께 집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날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철저한 준비로 아이를 완벽하게 돌보겠다는 다짐이 큰 의미 없다는 것은 이미 첫째 때 겪었기 때문에 젖병 소독기, 분유 제조기 등 육아를 편리하게 해주는 최신식의 장비와 도구들은 거의 구비하지 않았다. 몸이 고생한 만큼 얻어지는 배움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 우리는 그 경험을 육아에도 적용시켰다. 아내는 어쩌면 나보다 더했다. 첫째 때 빨아서 쓰는 순면 기저귀를 쓸 거라는 아내를 겨우 말렸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우리의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고집스럽고도 무모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렇게 키워낸 첫째의 경험적 기억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아내와 내가 추구하는 바가 비슷한 점도 그러하고 말이다.

‘왜 조리원을 보내지 않느냐’, ‘왜 그 편리한 장비들을 사지 않느냐’, ‘시골로 내려가면 아이 교육은 어떻게 하느냐’, ‘또 어린이집은 왜 안보내느냐?’, ‘아기가 춥다’ 등 첫째 때부터 지금까지 우린 주변에서 많은 걱정 어린 질문들을 받아왔다. 나는 우리의 방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당연하지만 주변에 권유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우리가 경험한 출산과 육아의 본질은 환경과 지식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이 부족하고 서툴렀지만 진심을 다해 보냈던 아내와 아이와의 시간이 무척이나 황홀했기에 어려운 환경에서도 둘째를 갖기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보낼 둘째와의 시간도 기대되는 이유가 되었다.
이번 둘째 출산에 즈음하여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특별히 해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편 덕분에 임신기간이 행복했다고 말해주는 아내와 유치원에서 딸이 추석 소원으로 ‘엄마가 동생 건강하게 낳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고 전해주는 선생님의 말 덕분에. 그렇게 고지식할 정도로 무모하고 고집스러웠을지언정 적어도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위안 삼을 수 있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