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늦은 휴가 일정으로 떠난 제주의 두번째 캠핑장소는 교래자연휴양림이었다. 전날 야영했던 붉은오름 자연휴양림에서 차로 약 10분 거리로 꽤나 가까운 곳에 위치하지만 장소가 주는 느낌은 많이 달랐다. 붉은오름이 조용한 숲속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면 교래는 무려 230만㎡의 면적에 조성된 자연휴양림으로 광활한 대자연의 스케일을 온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 가족은 이 곳의 잔디 사이트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넓은 잔디광장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확 트일 정도로 개방감이 뛰어났고, 그 주위로 둘러싼 숲이 마치 거대한 자연요새를 떠올리게 했다. 교래자연휴양림은 천연원시림이 보존된 곶자왈 지역 내에 자리잡은 것이 특징이다. 이틑날 오전 난 곶자왈을 체험하기 위해 탐방로로 향했다. 제법 길고 험한 코스이기에 아내와 딸은 야영장에서 머물기로 했다.
난 제주의 숲을 좋아한다. 화산 지형에 자리 잡아 지금의 울창한 모습을 갖추기까지의 과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숲길을 걷고 있으면 마치 숲이 만들어온 영겁의 시간 속, 특별한 존재로서 함께 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숲이 만들어낸 대자연의 경이로움은 현재 내가 겪고 있던 고난과 걱정거리들이 한낱 바람에 날아가 버릴 만큼 가볍게 여겨지게 만들기도 했다.
처음 발을 디딘 곶자왈도 그랬다. 아니, 그간 느껴왔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강렬했다. 이 곳은 마치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중인 현재의 시간과는 다른 차원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를 만큼 오래된 숲의 풍광은 홀로 걷는 나를 압도할 정도의 강한 기운을 느끼게 했고 그 자연의 일부에 불과한 사람에게 자연스레 길을 내어주는 것 같은 품격마저 느껴졌다.
교래 곶자왈 탐방로는 왕복 40분 코스의 ‘생태관찰로’와 왕복 230분 코스의 ‘오름산책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오전 시간이 온전히 허락된 난 ‘큰지리오름전망대’ 코스로 진행했다. 약 3.9km 길이로 짧은 코스는 아니지만 걷는 내내 보여주는 극적인 생태의 장면들 덕분에 전혀 지루함이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오름 정상에 도착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한 오름 전망대에서는 주변의 정취가 한눈에 들어왔다.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과 따뜻하게 감싸주는 햇살이 짧은 여정의 절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몇장 찍고 다시 돌아가는 길로 향했다.
같은 길을 돌아옴에도 불구하고 올라갈 때와는 다르게 조금 더 여유가 있어서 였는지, 주변을 좀 더 돌아보며 나무와 돌이 어우러진 경관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내려올 수 있었다. 불쾌하지 않은 습기와 흙 내음, 바람을 타고 느껴지는 숲의 온도가 오랫만에 제법 긴 시간을 걷느라 지친 몸뚱아리에 지속적으로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듯 했다.
약 3시간에 걸친 탐방을 마치고 입구로 돌아오자 마치 좋은 영화를 한편 보고 나올 때와 같이 깊은 여운이 느껴졌다. 곶자왈의 경이로운 자연이 기승전결 완벽한 각본이라면 가벼운 흙길을 지나 제법 가파른 등산로를 거쳐 마침내 오늘 정상까지 이르는 탐방로는 그 각본에 맞춰 극적이고 리듬감 있게 잘 짜여진 연출과 같았다. 여러모로 많은 영감을 떠오르게 하는 여정이었다.
이 곳의 보존을 위해 지역 주민들과 지자체의 많은 노력이 있었겠지만 제주의 곳곳이 개발로 인한 몸살을 겪으며 이미 무수히 많은 것들이 망가져 버린 지금, 이 숲을 보고, 걷고,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차 올랐다. 우리가 정말 소중하게 지켜나가야 할 것이 무언인지 이 제주의 숲은 오랜 세월과 풍파를 거치면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 무언의 가르침은 큰 울림이 되었다.
탐방을 마치고 캠핑장으로 돌아오자 꽤 오랜시간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던 딸이 어딜 다녀왔냐고 물었다. 멋진 숲을 다녀왔는데 길이 험해서 같이 가지 못했다고 하니, 자기가 좀 더 크면 아빠와 같이 가고 싶다고 말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커서도 이 숲을 온전히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빠로서, 기성세대로서, 그 숲의 가르침을 이어나가야 하는 한명의 인간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