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스트 (Minimalist)
미니멀리스트 (Minimalist)

적을수록 좋다. 미니멀 라이프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고 강요받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히려 덜어냄으로써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역설적 담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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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니멀리스트는 아니다. 그 기준이 모호하지만 내 생각에는 ‘나는 감정적 소비를 하는가’를 기준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다. 통상적으로 미니멀리스트는 물건을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로 인식하기에 꼭 필요한 물건 외에는 새로 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자주는 아니지만 욕구에 이끌려 물건을 들이기도 한다. 최근 사용하던 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기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라미 만년필을 새로 구매한 사례를 들 수 있다. 미니멀리스트 입장에서는 용인하기 어려운 소비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아니더라도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이유는 물건에 대한 생각, 환경에 대한 철학 등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기 때문이었다. 미니멀리스트는 물건의 소유를 최소화하며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본질을 찾고 지속 가능한 지구 환경의 미래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건 물건의 소비와 소유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환경에는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에 미필적 고의에 의한 환경 운동가가 되는 것이다.

수년 전부터 난 미니멀리즘을 일상에 적용해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그만큼 새로 들이는 물건이 적지 않아 미니멀리즘의 진정한 의미에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했다. 결국 진정한 미니멀이란 소비 습관을 넘어 물건에 대한 인식 자체를 개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글은 지금까지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내 일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지극히도 개인적인 경험과 견해에 대한 기록이다.

적게 사고, 오래 입고, 고쳐 입고. 물건을 대하는 인류의 책임감 있는 삶에 대해 깊은 영감을 준 파타고니아 창립자 이본 쉬나드의 책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물건의 의미

급진적이진 않더라도 실행 가능한 범위 안에서의 미니멀리즘은 나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사례가 있었다. 가지고 있던 책을 대부분 처분한 일이었다. 이미 읽었거나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동안 처분할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은 책을 물건이 아닌 지적 자산으로 여겨서 였을까? 책장에 가지런히 분류하여 꽂아 놓으면 마치 내 머릿속에 그 지식들이 채워져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작 일 년에 한번 손이 갈까 말까 한 책들은 그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볕에 바래지고 곰팡이가 핀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과감하게 책들을 처분하고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다시 책이 읽고 싶어진 것이다. 많은 책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독서와 거리 두기를 해왔는데 책들을 모두 처분하자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난 주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목적이 분명해진 물건은 나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다시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해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 중에 꼭 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을 확립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 거라는 말은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물건은 사용되어 질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물건은 사용하세요. 그 반대는 작동하지 않으니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미니멀리즘’ 중에서

추억은 물건이 아닌 사람에 쌓인다

그렇게 필요 없는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망설이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창고 구석에 있던 틴케이스를 열어보게 되면서다. 그 안에는 나의 학창 시절부터 대학생과 군 복무 시절까지. 친구, 친척, 지인, 썸녀, 부모님이 나에게 써준 편지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잠깐 꺼내 읽어 보기만 해도 추억 속 그 시절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해주는 물건들이었다. 그 물건들이 나에게 소중하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편지들을 몇 장 꺼내 읽으면서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라 실소를 머금거나 이를 데 없는 유치함에 닭살이 살짝 돋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추억이 담긴 이 편지들이 없어지면 슬플까? 이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난 어린 시절 추억을 일부 상실하게 되는 걸까?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한 나는 그 편지들 중에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던 한 명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예전에 나한테 편지를 많이 써줬었는데 그 시절 기억나?”

“응, 편지를 많이 썼었던 것 같은데 내용은 기억 나지 않아. 편지라는 게 그런 것 같아. 시간이 지나면 정작 쓴 사람은 기억을 잘 못해. 사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아. 기억해야 하는 건, 그 시절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고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이지.”

명쾌한 답이었다. 편지는 과거의 추억이 담긴 물건일 뿐이고 그 물건은 힘이 없다. 반면 사람에게 쌓이는 추억은 살아있는 것이고 현재의 인연을 더 소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편지 같은 추억이 깃든 물건을 보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건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 물건들이 내 인생의 한 부분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불완전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기억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결론짓고 난 편지들을 처분했다.

수년간 한 번도 꺼내어지지 않았던 편지들. 소중한 것은 그 물건이 아니라 마음 한편에 간직하고 있던 인연에 대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물질문화를 넘어서

가지고 있는 물건이 차고 넘침에도 불구하고 계속 쇼핑을 하는 이유는 대부분 물건에 대한 과도한 애정과 집착에서 비롯된다. 물론 물건과 사랑에 빠지거나 감정을 갖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물건에서 비롯된 감정은 상호 교류가 없다는 점이 물건에 대한 집착을 만든다. 따라서 원하는 것을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끼게 되며 결국 물건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나의 경우에는 브롬톤 자전거가 그랬다. 유려한 디자인의 미니벨로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결혼 후 바빠지면서 자전거 탈 시간과 여유가 없어졌고 나의 브롬톤은 접어진 채로 현관에 처박혀 일 년 넘게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런 브롬톤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이 느껴졌고 난 그때부터 필요하지도 않은 부품들을 구매해 자전거를 튜닝하기 시작했다. 물건에 대한 집착이 비이성적인 소비로 변질된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브롬톤을 중고거래를 통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양도했다. 구매자가 타고 가는 뒷모습을 보니 비로소 마음이 후련했다. 물건을 소유하는 것은 그 책임을 동반한다. 평소에는 잘 인지하지 못하다가 소유한 물건이 경험의 가치와 멀어질 때 불현듯 ‘내가 이걸 왜 가지고 있지?’라는 생각과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이것이 내가 행복한 삶을 위해 물질문화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였다. ‘자전거를 좋아해’와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해’를 혼동하지 않도록 말이다.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말이 있다. 사물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물의 필요성이며 장식적인 형태를 배제하고 사물 본연에 맞는 재료와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는 모더니즘 사조이다. 모더니즘은 산업 디자인의 패러다임을 바꿨으며 미니멀리즘의 뿌리가 되었다. ‘형태’는 물성이고 ‘기능’은 경험이다. 내가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이유는 내 일상의 영감이 되는 것이 물건 자체가 아닌 그 물건이 가진 경험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물건이 많을수록 경험의 깊이는 줄어들기에 불필요한 물건을 갖지 않아야 할 마땅한 동기가 된다.

미니멀 라이프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아니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 다뤄져야 한다. 다만 더 나은 환경을 위해 나와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긍정적 역할이 있다면 담론화할 필요성을 느낀다. 물건을 줄이며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저녁식사를 하며 다섯 살 딸에게 별생각 없이 어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게 제일 즐겁냐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잠시 고민하던 딸이 해맑게 웃으며 건넨 말에 아내와 난 한동안 멍하니 서로의 눈동자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 아빠랑 같이 노는게 더 좋아서 장난감은 필요 없어.”

어떤 장난감보다 부모와의 시간이 더 소중하다 말했던 아이는 행복의 본질에 대해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걸까?

ROVEWORKS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1인 사업가이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생각을 전달하는 일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일 잘하는 일은 아무것도 안하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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