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성시경이 싫다

딱히 싫어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부터 나만의 애증의 가수로 자리 잡은 성시경에 대하여
2024년 06월 24일

“별일 없니 햇살 좋은 날엔..”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가 거슬리는 목소리를 통해 들려온다. 박기영의 ‘산책’은 첫사랑에 실패한 풋풋했던 스무 살에 내가 떠올라 플레이리스트에 자주 올라갔던 노래였다. 그런데 흘러나오는 노래는 박기영이 아니라 성시경이 리메이크한 버전이었다. 오늘은 좀 새로운 노래를 들어보자 해서 인기 급상승 곡을 스트리밍 한 것이 화근이었다. 좋은 노래도 많이 가지고 있는 양반이 왜 굳이 이 곡까지 손을 댄 건 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성시경의 리메이크 곡 ‘산책’

나와 그 가수. 그렇게 당사자는 전혀 알 수 없는 악연은 꽤나 오래전부터였다. 원래부터 좋아하는 가수는 아니었지만 결혼 전, 콘서트 티켓 예매에 성공하여 지금의 아내에게 선물했을 때 10년 가까운 연애 기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던 환희에 찬 모습을 본 것이 결정적이었다.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호불호가 명확했던 그녀의 취향에 맞는 선물을 고르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고작 그 가수의 콘서트 티켓 한장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을 보여주다니.

이미 빈정이 상해버린 나였지만 유치하게 내색할 수 없었다. 콘서트 티켓은 두 장이었지만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기 싫었다. 결국 내가 생각해낸 묘안은 아내와 지금의 장모님을 함께 보내 드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티켓을 전달하고 근래 엄마가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아내의 말에 난 또 한번 좌절했다. 결혼 전까지 늘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 보시던 장모님이었다.

그렇게 난 결혼 후에도 반강제적으로 그 가수의 노래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대중음악을 잘 듣지 않고 연예인에도 별 관심 없던 아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가수였기에 그마저도 못 듣게 하는 건 매우 편협하고 속좁은 남편의 표상으로 비치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출근길 함께 탄 차의 라디오에서 그 가수의 노래가 나오면 내 눈치를 슬쩍 보고는 슬그머니 볼륨을 키우는 모습도 매우 거슬렸지만 모른척해야 했다.

그렇게 좋든 싫든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던 그 가수는 내 일상에도 적잖이 영향을 주었다. 오랜만에 지인들과 잔뜩 취해 노래방을 갔을 때 아이러니하게 눈에 들어오는 노래가 그 가수의 곡들 뿐이었다. 가사를 보지 않아도 입에 착 달라붙어 술술 불리는 것이 이미 아내 덕분에 숱하게 들어 단련되어 그런 것 같았다. 아마 당시의 지인들에겐 당연히도 내가 그 가수의 열렬한 팬으로 보였을 것이다.

20년을 넘게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그 가수의 꾸준함 덕분에 악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끔 유튜브나 방송에 나와 넌지시 던지는 농담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거나 추천곡 리스트로 흘러나올 때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는 내 모습에 자괴감이 느껴지면서도 어느덧 나도 그 가수와의 인연이 이미 깊어졌음을 인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에 이르렀다. 여전히 자존심은 상하지만 말이다.

작년 연말, 오랜만에 아내에게 좋은 선물을 하고 싶어 다시 한번 그 가수의 콘서트 티켓 예매를 도전했지만 결혼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둔해져 버린 나의 반응속도는 제대로 클릭조차 해보지 못하고 단 몇 초 만에 매진이라는 화면을 보여주며 씁쓸한 마음으로 노트북 화면을 닫게 했다. 애증 어린 마음에 콘서트 예매로 화해를 시도했던 나에게 끝까지 굴욕을 선사한 그 가수였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리메이크 된 그 가수의 ‘산책’을 듣고 있다. 익숙해서인지 아니면 지난 추억들을 떠올라서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노래보다는 조금 더 편하게 들려와 반복 재생하는 내가 싫을 뿐이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아무쪼록 이 글을 쓴 것이 무색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사건 사고 없이 오랫동안 활동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분명히, 여전히 난 성시경이 싫다.

ROVEWORKS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1인 사업가이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생각을 전달하는 일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일 잘하는 일은 아무것도 안하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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