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는 ‘혐오의 시대’에서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인 예고’와 ‘묻지마 칼부림’ 같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끔찍한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유튜브에서는 물어뜯기 좋은 이슈나 대상이 등장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여론몰이를 통해 수익의 대상으로 이용한다. 사실 관계나 대상에 대한 존중은 뒷전이다. 그런 가치보다 여론몰이를 통해 키워진 혐오의 감정이 이득이 되는 세상인 듯하다.
최근 언제부터인가 나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 혐오의 감정에 대한 경각심이 낮아짐을 자각하게 되었다. 욕하거나 비난하는 행위가 당장의 스트레스 해소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류들이 모여 여론이 되면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와 돌이킬 수 없는 문제로 이어지고 이에 대한 책임은 모호해지게 된다.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 사회를 좀먹고 있는 ‘혐오’의 기류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름 오랜 고찰과 자기반성을 통해 몇 가지 깨달은 점이 있었다.
스스로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
타인에 대한 혐오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스스로 혐오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는데 바로 흡연자일 때였다.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하고 내뿜는 담배연기와 무심코 버린 담배꽁초가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난 사람들이 입는 피해보다 내 흡연욕구가 더 중요했고, 그런 이기적인 모습이 타인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 것이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흡연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나빠지고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도덕성의 결여는 바로 혐오의 직접적인 원인 된다. 안타까운 건 평소에는 지성인인 듯 행동하던 사람이 본인의 과오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을 때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며, 그 위선적인 모습은 사람에 대한 또 다른 혐오로 이어지게 된다. 때문에 혐오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스스로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말이나 행동이 있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름을 인정할 것 (feat. 세대차이)
최근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아이폰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안드로이드 폰은 기성세대의 느낌이 난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현상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세대 갈등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 폰을 주로 사용하는 기성세대는 비싼 아이폰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를 허세 가득한 ‘등골 브레이커’라고 비난하고, 반대로 젊은 세대는 그런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선을 그으며 혐오의 감정을 유발한다.
안타깝게도 ‘나와 다른 것 = 틀린 것’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유행이나 트렌드는 어느 세대에나 존재했으며, 그 흐름은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판단으로 쉽게 바뀔 수 없는 것이다. 다름을 받아들이되, 그로 인해 유발되는 문제가 있다면 심도 있는 고민과 해결을 돕는 것이 기성세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현재 기성세대는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기성 언론은 이런 현상을 편향적인 시선으로 보도하며, 어른들은 그런 기사를 무지성으로 받들며 세대 갈라 치기를 통한 혐오를 유발한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경험과 배움의 미덕이기에 기성세대가 솔선수범이 되어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기성세대발 혐오의 감정은 젊은 세대로 빠르게 전염될 것이다.
그냥 흘려보내는 연습을 할 것
최근 사회적 논란은 대부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기인한다. 오래전부터 문제가 되고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플랫폼의 게시글은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표현들로 가득하며 이로 인한 혐오를 유발한다. 또한 내 의견을 굽히는 것이 곧 ‘패배’고 내 의도대로 관철하는 것을 ‘승리’로 여기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이분법적인 경쟁구도는 화합을 좀 먹고 혐오의 감정을 키운다.
난 그런 이유로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을 지양하지만, 또한 그곳에서 얻는 정보나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활동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나름의 활동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 격화된 논란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 두 번째, 의견에 비난이나 욕을 포함하지 않을 것. 세 번째, 누군가를 가르치려 하지 않을 것 등이다.
혐오의 감정이 커질수록 이득 보는 집단은 분명 존재한다. 이들은 혐오를 통해 얻어지는 부정적 에너지를 집단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동력으로 치환하는 교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런 영악한 집단에 이용당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과열된 사안일 경우, 때론 중립적인 시각을 통해 흘려보내는 자세도 필요하다.
혐오에 휘둘리지 않는 것, 결국 자기생존의 문제
우리 사회는 현재 혐오의 감정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 성숙된 사회로 도약을 위해 불가피한 과정이라면 어느 정도 의미 부여가 가능하겠지만, 최근 이로 인해 소비되는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으로 볼 때, 언제부턴가 우리는 혐오를 통해 스스로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아름답고 긍정적인 감정으로만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좋은 영감이 되고 행복한 일상을 만드는 감정이 ‘혐오’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기에 세대, 남녀, 좌우 등의 ‘갈등’으로 대변되고 있는 혐오의 감정은 ‘화합’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쓸모없는 가십과 논란은 무시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이득을 보는 집단 또한 철저히 소외시켜야 한다.
그렇게 혐오의 감정에 이용당하지 않을 때, 비로소 세상을 아름다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진정한 자유와 풍요로운 일상을 맞이할 수 있다. 결국, 잘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혐오를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생각이 모아져 시대정신으로 거듭날 때, 우리는 더 살기 좋은 사회로서 한 걸음 더 가까워질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