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맞이하는 새해지만 올해는 유독 그 무게감이 크게 다가오는 듯하다. 나는 올해로 나라에서 정해준 만 40세가 되었다. 한때는 너무 먼 이야기였고 가끔은 동경하기도 했던 중년의 출발점에 비로소 도착했다. 막연하게 ‘많은 나이’라고 생각했던 언젠가의 지금이 어느덧, 아직은 ‘젊다’라고 처연하게 자위하고 있는 지금으로 다가와 버린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새해 결심에 대한 큰 감흥은 없었다. 워낙 즉흥적인 성격이기도 하고 어떤 시기에 맞춰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위선 혹은 가식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보면 편협하고 철없는 생각이었지만 어쩌면 청년이라고 불리던 시기의 패기와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태도가 아닐까 싶다.
지금에 이르러 그 젊은 날의 에너지는 오래 쓴 배터리처럼 효율이 떨어져 버렸다. 새것으로 교체가 되지 않는 인간이라는 제품의 숙명적 태생으로서 그 구실을 제대로 하려면, 고장 난 부분을 고치고 아직 멀쩡한 부분도 잘 관리해서 남은 수명에 맞게 잘 살아가야 한다는 새로운 책임이 부여되었다. 아래는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지켜야겠다고 다짐한 새해 결심에 대한 내용이다.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할 것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우리가 20대 때 술 먹고 밤새 놀아도 지치지 않았던 체력은 원래 인간이 출산을 하고 양육을 하기 위해 허락된 것이었다.’ 사회학자 혹은 여성학자가 보면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야만적으로 읽힐 수 있겠지만 난 ‘인간의 체력은 인생의 선택에 의한 기회비용으로서 유한한 재화임을 인정해야 한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2-30대를 나를 위한 시간으로 보내고 뒤늦게 가장과 아빠의 역할을 시작한 나로서는 그 기회비용을 메우기 위해 건강관리를 통한 체력 안배를 잘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첫 번째로 금연. 작년부터 몇 번째인지도 헤아릴 수 없는 금연을 다시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좀 더 단호한 결의로 성공에 이르러야겠다고 다짐했다. 30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금연이 주는 체력적 이점을 체감하였기에 좀 더 현실적인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 더군다나 요즘같이 담배 피우기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에 이를 신경 쓰지 않고 어떻게든 흡연을 할 열정마저 이젠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도 금연의 성공 확률을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두 번째는 운동. 어쩌면 40대의 운동은 금연보다 쉽지 않다. 꾸준함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로 수행할 수 있는 활력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활력은 운동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운동을 하지 않는 중년은 운동을 꾸준히 할 동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정말 와닿는데, 매일 5분씩 운동하는 목표를 세우고 실행하는 것 마저도 귀찮게 느껴져 큰일이다.
마지막으로 스트레스 관리. 중년의 위험한 대부분의 질환은 스트레스에서 비롯된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물리적인 체력은 스스로의 관리를 통해 개선이 가능하지만 정신적인 건강은 사회적 요소나 외부 환경에 따라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방법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받는 스트레스는 그대로 두고 그 스트레스를 잘 내보내는데 초점을 두었는데, 스트레스 허용량이 한계에 이르면 모든 일을 멈추고 나가서 안정될 때까지 걷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이 방법은 체력적인 부분과도 도움이 되기에 꾸준히 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한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을 것
2023년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좋지않는 일들이 많았다. 경제 상황 악화로 인한 불안과 위축은 사람들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했고 여기에 숟가락을 얹은 정치인들의 행태는 사회적 갈등을 더욱 부추겼다. 나 또한 그 시류에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 한 명이었고 어느새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모습에 새삼 마음을 다잡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때 남겼던 글, ‘혐오의 시대에서 휘둘리지 않는 방법‘이 있다.)
시류라는 것은 말 그대로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그리고 개인인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나의 삶을 이어나가야 하기에 적어도 어른이라는 말을 듣기 시작한 이 시기에는 외부적인 요소가 나를 변화시킬 수 없는 단단한 내면의 벽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벽은 철저한 자기성찰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 사회 등의 이슈가 나의 삶과 무관할 수는 없기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필요한 논쟁과 혐오의 시장에 스스로를 내던질 필요는 없다. 대전제는 그럴듯했더라도 과열되어 버린 대부분의 논쟁은 감정적이고 자극적이며 그런 과열된 에너지가 요즘 유행하는 표현인 ‘도파민 중독’을 일으켜 어느새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 인생의 대전제는 나와 가족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것이다. 비록 벌이가 줄어 매출이 반 토막 난 작년 한 해였지만 그로 인해 불안한 감정을 가족과 나눌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일을 줄이고 아내와 아이와 함께 여행을 다닌 시간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나 또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비로소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다.
본질에 충실할 것
어쩌면 본질이라는 말보다 추상적이고도 막연한 단어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철학적이며 유기적으로 느껴지는 이 개념은 쉽사리 정의를 내리기 어렵고, 살아가면서도 항상 그 단어의 의미를 찾게 된다. 나 역시 지금도 그 의미를 찾아가는 중이지만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상황에서의 본질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과의 관계를 예로 들 수 있다. 외식 메뉴를 고를 때 아내와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메뉴를 먼저 물어보는 것,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아내와 함께 마실 커피를 내리는 것, 아이가 도움이 필요하거나 투정 부릴 때 눈치 보지 않고 먼저 가는 것, 내가 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사람인지 생각하는 것이 본질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가끔은 혼자만의 게임할 시간을 지켜내는 것도 본질이다. 내 기준에서는 그렇다.
견적 및 일정 등 사무적인 부분에 앞서 클라이언트가 나와 같이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해 되짚어 보는 것이 내 일의 본질이며,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소중한 시간을 들여 나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에 오는 수고스러움을 생각하는 것이 내 인간관계의 본질이다. 그 의미들을 다른 이유로 합리화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내 삶의 본질이다.
때로는 욕구와 이해관계가 본질을 흐리기도 한다. 나 역시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쫓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허영의 늪으로 빠져버린 경험을 종종 하기도 했다. 그 끝은 역시 공허함뿐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 공허함마저 경험으로 위안 삼을 수 있었지만 지금에서의 경험은 스스로의 추태를 돋보이게 할 뿐이었다.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본질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인생의 큰 빛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매년 결심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마도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계획과 결심에는 유통기한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져 생각해 보니 작년에도 지금과 비슷한 결심을 했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나이는 먹었지만 정작 늘은 것은 그럴듯한 말만 번지르르하게 내뱉는 약아빠진 입이 아닐까 싶다. 때문에 올해에는 무뎌질 때마다 이 글을 한 번씩 다시 꺼내보자는 또 하나의 결심으로 남겨 본다.
너무도 개인적이고 회고적인 이 글이 보는 이로 하여금 영양가 없이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그냥 이 시기에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도 있더라 정도로만 생각해 준다면 좋겠다. 지키지도 못할 결심을 매해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새해 결심이라는 구실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억지로라도 만들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반이 된 다면 좋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