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지 말 것

바쁜 현대인들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속도'와 '효율'에 매몰되어 놓치고 있던 공백의 시간에 대하여
2024년 05월 30일

나는 빠릿빠릿한 성격은 아니었다.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 내적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었고, 그마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나의 부모 혹은 주변에서 답답함을 느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내 삶의 속도는 남들보다 몇 발자국씩 늦었다. 돌이켜보면 좀 게을렀다고는 생각한다.

나는 학생 때부터 강제적이고 통제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공교육에 대한 자발적 보이콧으로 이어졌다. 당연하게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학 진학에 실패했고 그대로 사회에 내던져졌다. 그 후 게임을 하면서 며칠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목적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스무 살의 백수는 무서울 정도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에너지가 생산적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당시 주변의 시선으로 보면 난 실패한 낙오자였다.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피부로 느껴졌다. 대한민국에서 황금 같은 20대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다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었다. 나도 참 독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열정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 내 모습이 떳떳하지는 않았지만 불현듯 스치는 불안감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들은 무의미했을까? 나는 그 시간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고 인정하며 나아가 현실적인 인생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다. 뒤늦게 대학에 진학한 것도, 눈칫밥에 못 이겨 들어간 회사에서 1년도 못 버티고 뛰쳐나온 것도, 그 후로 10년 넘게 혼자서 일해온 것도 모두 그런 시간을 통해 이루어졌다. 다행히 아직까지도 먹고사는데 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일에 중독되게 만들었다. 결국 노동이 인간의 존엄과 다양성에 대한 가치를 무시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현상에 따르면 돈을 벌기 위한 노동 이외에 인간이 행복에 이르기 위한 여정. 즉, 여가, 휴식, 결혼, 출산과 육아, 가족을 위해 보내는 시간 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되는 셈이다. 자신만의 속도로 사는 삶이 비주류 혹은 나태하다는 등의 취급을 받았었던 구시대적 가치에 더 이상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내가 이 주제를 고민할 수 있도록 큰 영감이 된 책이다. 이 책에서 러셀은 ‘노동을 줄이는 것이 인류의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주장한다. 요즘의 시대정신에도 부합하는 이 책은 놀랍게도 1935년에 쓰여졌다. 행복한 삶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살아왔지만 많이 지쳐있고 마음 한편에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 보길 추천한다.

노동은 더 이상 신성한 가치가 아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말은 노예를 착취하며 놀고먹는 귀족들을 비판하는 종교적 가르침일 뿐이었다. 따라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 비정한 사회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기계들이 일을 대신해 사람들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더욱이 말이다.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가질 필요가 없다. 다 살아진다. 나름의 방식으로.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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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1인 사업가이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생각을 전달하는 일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일 잘하는 일은 아무것도 안하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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