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능률 중학교 영어 교과서 표지 디자인

우연치 않은 기회로 중학교 영어 교과서의 표지 디자인을 의뢰받았다. 작업 내내 쉽지 않은 프로젝트였지만 다양한 시도를 통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던 과정을 결과물과 함께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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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ject : NE Neungyule Middle/High School English Textbook Cover Design
  • Category : Illustration, Print, Book design
  • Date : 2017.7.15
  • Client : (주)교보피앤비, (주)NE능률

2017년 여름. 처음 영어 교과서 표지의 디자인을 의뢰받았을 때는 좀 의아했다. 책, 홍보물 등 출판과 관련된 일은 제법 했었지만 교육과 관련된 출판물의 경험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교육부의 검정 및 인정을 받은 메이저 출판사의 영어 교과서 표지 디자인이라 그 부담감은 상당했지만 디자이너로서 새로운 분야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그만큼 재미있는 일이 될 거라는 직감 또한 강하게 들었다.

교육 분야의 디자인은 일반적인 상업 시장의 것과는 결을 달리한다. 파격적이고 유행적인 느낌보다는 안정적이고 고전적인 느낌을 선호한다. 이는 다수의 학생들이 사용하기 때문에 호불호가 나뉘면 곤란하며 교육부의 검정을 받아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사소한 문제도 큰 논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디자이너의 창의적 역할은 극도로 제한되며 편집자가 머릿속으로 미리 그려놓은 디자인을 표현해 주는 오퍼레이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번 작업은 조금 달랐다. 기존의 교과서들과는 차별화된 표지 디자인을 선보이고 싶다는 것.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새로운 디자인으로 시장의 평가를 받아보고 싶다는 것이 의뢰한 고객사의 핵심 주문이었다. 때문에 시안 과정부터 큰 제약 없이 다양한 디자인을 제안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결정권자의 확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온전히 내 머릿속에서 나온 이미지를 결과물로 선보일 수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반려된 수많은 표지 시안들 중 일부

하지만 난 그 대가로 수많은 시안의 반려, 속된 말로 까임을 경험해야 했다. 디자이너는 그 과정을 고객과 가까워지는 과정, 소통과 공감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과정을 버티지 못하면 프로젝트를 끝까지 끌고 갈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고객이 원하는 바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공을 들인 주요 안들이 모두 까이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대충 날림으로 그린 손그림으로 교과서 단원 별 주제를 표현한 시안이 결정되었을 때는 그 충격이 꽤 오래가기도 했다.

일러스트레이션은 내 전공분야는 아니었다. 대학 때 관련 커리큘럼이 있긴 했지만 옆자리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멋진 캐릭터를 단번에 슥슥 그려내는 동기를 보면서 이쪽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후로 말이다. 하지만 잘하는 것만 하는 디자이너는 거친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난 일하면서 필요할 때는 어떻게든 울며 겨자 먹기로 그림을 그려내곤 했다. 그런 나에게 일러스트 안이 결정된 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추후 작업될 모든 결과물에 손그림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투박하지만 정감 있고 밝은 색감으로 축제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구성하는 것이 그림의 핵심이었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총 3권의 표지를 점진적이면서도 일관성 있는 그림으로 그려내기 위해 당시 나의 굳은 손으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컨펌을 요청할 때마다 돌아오는 어마어마한 수정 사항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우여 곡절을 통해 최종 완료를 통보받은 날에는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현재 내가 작업한 표지의 영어 교과서는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 이후 고객사 내부적으로 꽤 좋은 평가를 얻어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를 추가로 계약해 진행하기도 했지만 해당 프로젝트를 통해 출판 업계에 슬그머니 명함을 내밀어 봐도 관련 의뢰가 빗발치거나 하지 않는 걸 보면 시장에서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한 모양이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존재하지만 프로라면 결과도 덤덤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후 추가 계약을 통해 진행했던 고등학교 검정 및 인정 교과서 표지 디자인 작업물

이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는 지친 심신 회복을 위해 지인과 함께 평소 좋아하지도 않았던 해외여행을 떠날 정도로 소진되어 버렸다. (해당 여행기는 미야자키-가고시마 여행기 1 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외주 일을 하면서 많은 부침을 겪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다면 자유롭게 일하고, 평가받고, 온전히 책임지며 성장하는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삶의 흔적은 이후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진하게 남는다. 이 작업을 마친 수년 후, 투 잡으로 쿠팡 물류센터에서 야간 검수일을 하면서 무심코 뜯은 포장박스 안에 내가 디자인한 그 영어 교과서를 발견했을 때 처럼. (해당 글 ‘쿠팡 물류센터 야간 근무 경험기‘ 참조)

ROVEWORKS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1인 사업가이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생각을 전달하는 일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일 잘하는 일은 아무것도 안하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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