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꽤 많은 것들을 비워낸 해였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낸 만큼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다분히 희망적이다. 특히 올해 본격적으로 미니멀라이프를 추구하면서 일상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골프, 친목, 모임 등과 같은 관계 지향적 취미를 줄이면서 독서, 글쓰기, 운동 등의 자기 계발에 집중할 수 있었고 다시 스스로의 내면을 성장시킬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찰했고 그렇게 찾아낸 관심 분야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몰입의 경험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덜어내고 다시 채운 올해 삶의 흔적을 몇 가지 기록을 통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올해 중고로 처분한 물건의 총 판매액 : 9,646,400원
소박한 삶을 위해 불필요한 물건들의 대부분을 정리했다. 그동안 심리적 공허함을 소비생활로 달래면서 많은 물건들이 내 주변에서 쓰임 없이 방치되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물건의 가치는 필요한 누군가를 통해 재평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름 합리적인 가격으로 중고시장에 내다 팔았다. 아내도 나의 삶의 방식에 일정 부분 공감해 사용하지 않는 가전과 가구를 함께 처분했다. 그렇게 적은 양은 아니었지만 올해에만 처분한 중고 판매 금액이 천만 원에 육박하는 것은 새삼 놀라웠다. 어렵게 처분한 만큼 내년에는 새로운 물건을 들이지 않는데 중점을 두고 물질주의에서 벗어난 삶을 살기로 다시 한번 결심했다.
올해 우리 가족이 겪은 가장 큰 변화 : 딸의 유치원 입학
딸이 유치원에 입학한 것은 어린이집을 보내지 않고 가정 보육을 해오던 우리에게 가장 큰 일상의 변화였다. 특히 하루 종일을 아이와 시간을 보내야 했던 아내가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기에 다행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고무적이었던 것은 예민하고 소극적 기질의 아이가 처음으로 나름의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딸은 어릴 적 나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외동으로 자란 나는 또래들과 교류하는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어려워 했다. 그런 모습을 나의 아이를 통해 다시 보는 것이 안쓰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 보다는 느리지만 천천히 적응하고 그 안에서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딸이 대견했다. 그런 딸을 보며 나 또한 스스로 닫아 놓았던 성장판을 다시 자극시켜 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해였다.
올해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 : 차이에 관한 생각
‘침팬지 폴리틱스’로 유명한 영장류 학자인 ‘프란스 드 발’의 책이다. 젠더에 따른 특징과 차이를 수컷 중심 사회인 침팬지와 암컷 중심 사회의 보노보의 영장류 연구에 따른 사례를 통해 보여주며 불필요한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가짜 페미니스트들의 논리에 근본적인 반론을 제기한다. 그의 연구가 인간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쉽게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종교, 정치, 경제, 문화 등 인간이 이룩한 모든 분야에 걸쳐진 젠더 문제가 과연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깊이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크게 와닿았다. 어쩌면 현재 우리 주변에 만연한 젠더 갈등은 실존적 가치가 없는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통해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서라도 성차에 대해 극단적 입장을 취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올해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 : 어느 가족
가족의 관계적 의미를 현실적인 화법으로 해체하고 재결합하여 담아낸 영화다. 가족이라는 개념의 추를 가짜와 진짜의 양쪽 저울에 하나씩 올려두고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냉소적 상황에서 당신은 어느 쪽으로 무게를 둘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온화한 시선으로 던진다. 나이가 드니 감정의 기복이 크거나 클리셰가 난무하는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이 영화는 충분히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풍부한 감정선이 존재하며 관람 이후에도 씁쓸하게 남는 뒷맛과 잔상이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사실 힘들고 어려울 때 가장 가까이서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가짜든 진짜든 상관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올해 가장 뿌듯했던 일 : 금연 성공 및 체중 감량
간간히 피워오던 담배를 본격적으로 끊은지 420여일이 지났다. 그동안 셀 수 없이 시도했던 금연과는 다르게 최장 기간이자 성공의 확신이 강하게 드는 회차이다. 스스로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남의 눈치를 신경쓰는 성격이 금연에 큰 도움이 된다. 요즘엔 어디서든 흡연자가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린 딸을 가까이할 때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 금연의 지속적인 동기부여가 된다. 그리고 올해 초, 등산을 시작하며 무거워진 몸뚱아리에 회의감을 느껴 시작한 운동으로 약 7kg 가량을 감량했다. 덕분에 몸은 가벼워지고 근육량은 늘어 일상의 활기가 더해졌다. 본격적인 중년을 맞이한 나에게 건강을 스스로 관리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내년에도 잘 유지하기로 결심해 본다.
다시 희망의 새해를 맞이하며
2024년은 국가적으로도 다사다난했지만 개인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은 해였다. 반토막 난 매출과 줄어든 일거리로 본격적인 경기침체와 업계의 변화를 실감케 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울며 겨자먹기로 도전한 새로운 분야에서 사업 전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자연스럽게 줄어든 외주 일 대신 자체 콘텐츠를 생산하는데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오래된 포트폴리오가 진열되어 있을 뿐이었던 웹사이트를 지금처럼 개편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시간을 통해 가능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오랜 시간 고여서 썩기 직전의 나를 격한 파도가 넘실대는 대양으로 들이 밀어준. 그래서 배를 타고, 닻을 올리고, 다시 초심의 모험가로 돌아오게 해준 시기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 글은 해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뭐라도 남기지 않으면 지금의 생각과 마음가짐이 잊힐까 두려워 남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다. 누군가에게는 어떤 영감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크게 영양가 없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저 ‘이런 삶도 있구나.’라고 가볍게 넘겨도 좋을 것이다. 만약 당신 역시 나처럼 쉽지 않은 한 해를 보냈다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평범한 소시민이 있다는 것을 공감해 주길 바란다. 내년은 분명 더 나은 해가 되길. 나와 당신 우리 모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