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즉 AI(Artificial Intelligence)가 온 세상을 뒤덮으면서 나의 삶에도 많은 변화와 고민이 생겼다. 당장 내 밥벌이를 앗아갈까에 대한 위기의식부터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생존 전략까지.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가 현재의 삶을 더 각박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얼리어답터(Early-Adopter)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대의 흐름에는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스스로였기에 그 충격은 더 크게 와닿았다. 하지만 기계 따위에 삶의 위협을 느낀다는 것이 억울하기도 하고 바닥에서부터 힘겹게 키워온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게 자리 잡은 나로서는 행복한 삶을 위해 시대에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AI에 대한 거부감을 덜어내고 나의 일상에 최대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 남짓 축적된 경험과 나름의 고찰을 통해 얻게 된 깨달음을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남겨보고자 한다.
AI는 나의 삶을 나아지게 했는가
나의 경우에는 분명히 그렇다. 나는 소규모의 스튜디오를 10년 넘게 운영해오고 있지만 AI를 활용하고 있는 지금의 워크플로가 그 어느때보다 효율적이다. 나의 주요 업무는 디자인과 웹 개발이다. 1인 기업이라고는 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프로젝트일 경우 혼자 모든 업무를 감당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때마다 계약직 혹은 파트너십을 통해 인력을 충당했다. 때문에 협업을 위한 사무공간과 시설도 필요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고정비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AI를 업무에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디자인 업무에 가장 많이 시간이 소요되는 시장 조사와 레퍼런스 찾기는 사람보다 더 정확하며 빠르게 해내고 심지어 웹 개발을 위한 코딩은 내가 알지 못하는 더 효과적인 방법도 가르쳐 주면서 문제 해결을 도왔다. 밤새 검색하면서 코드를 수정하는 일은 더 이상은 없었다. 덕분에 2-3명의 팀으로 진행해야 하는 프로젝트를 혼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고, 불필요한 사무공간과 인력 채용에 대한 부담도 줄일 수 있었다. 철야 업무가 사라지고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는 현재의 내 상황을 볼 때 AI는 가히 혁신이라 할 만하다.

혁신의 이면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혁신이었지만 부작용도 존재한다. 피부에 가장 크게 와닿는 것은 전문 영역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수입의 감소다. 기존 업무의 처리 시간과 난이도가 비약적으로 줄어들면서 기존의 전문성으로 평가되던 비용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추세다. 이는 경제 불황과 맞물려 나에게도 적잖은 타격을 입혔는데, 기존에 거래하던 기업에서 비용 절감을 위해 외주 업무를 줄이고 AI를 활용하여 자체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그런 흐름으로 업계에는 전반적으로 큰 불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주변의 많은 동료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다른 직업으로 전직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하고 있다. 지금의 나 또한 그런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역사적으로 산업혁명처럼 혁신의 이면에는 소외되는 계층이 필연적으로 발생했고 인류 또한 문명을 주도하며 그에 대한 꾸준히 대비책을 마련해왔지만, AI 혁명이 이전의 산업혁명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차이점이 있다. 불가피한 시대의 흐름이라고 하기에는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AI는 말 그대로 인공지능이고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한다. 때문에 앞으로 인간이 인공 지능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해질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우리가 수십 년 전, 영화나 소설로 보아왔던 인간 문명과 기계가 충돌하는 비극적인 미래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은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AI가 인간을 기만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지브리 스타일의 그림을 그려주는 AI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사태를 보고 원작자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역겹고 모욕적이다’라고 일갈했다. 인고와 수련을 통해 완성한 자신만의 그림체를 기계가 수초만에 공공재로 만들어 버리고 허락 없이 소비되는 상황이 창작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달갑지 않을 법 하다. 나도 창작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작가의 입장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일각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늙은 예술가의 한탄으로 폄훼하는 사람들도 적잖이 보인다. 그들은 자신이 인생을 바쳐 완성한 성과를 AI가 아무런 대가 없이 취득하고 무한 복제하여 배포하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과연 초연해질 수 있을까?

이세돌이 바둑계를 은퇴하면서 남긴 말도 이와 비슷해 보인다. ‘나는 대국을 사람과 사람이 만드는 하나의 예술이라 배웠다. 그래서 상대방의 기보를 연구하며 이에 대한 해법을 찾고 자신만의 바둑으로 승부하는 과정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파고와 대국 이후로 그 일련의 과정이 무색해졌다. 지금은 대국에서 이기기 위해서 기계가 분석해 주는 기보를 공부해야 한다. 사람은 없고 승패만 남은 상황에서 더 이상 바둑을 지속해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라고 말한 인터뷰가 인상 깊었다. 사람과의 승부를 위해 기계에게 배워야 하는 역설적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평생을 바친 바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선택이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AI의 홍수속에서 살아남는 방법
개인적 견해로 AI와 사람의 창작물에는 미묘하지만 확연히 구별되는 차이가 존재한다. 바로 맥락과 서사다. 사람이 만들어낸 창작물에는 태생의 근본적인 이유부터 제작 과정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 완성된 결과물이 창작자와 수용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통찰까지 내재되어 있다. 이것이 맥락이다. 이를테면 최근 내가 그린 아래의 그림을 예로 들어보자.

위 그림은 나와 딸이 올해 봄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아빠의 그림을 좋아하는 여섯 살 딸 덕분에 미대 출신이지만 그림과는 담을 쌓았던 내가 펜을 들게 되었다. 이미 굳어 버린 손을 탓하며 어렵사리 그린 그림에는 딸에게 듬직하게 보이고 싶은 아빠의 모습을 과장되게 그린다거나 딸이 평소 멋지다고 말해주는 옷차림과 내가 좋아하는 딸의 양 갈래머리까지 담겨있다. 이 단순한 그림 한 장에도 이런저런 진심이 제법 녹아들어 있는 셈이다. 물론 창작자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는 맥락이지만 그런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것 자체를 AI는 아직까지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나와 딸의 이야기를 아무리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그림을 요청해도 어색하고 기시감 있는 그림만을 그려내는 걸 보면 말이다.
덧붙여 창작자가 보여준 삶의 방식과 철학이 결부되어 결과물에 의미가 더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서사이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예술의 가치이기도 한데,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1918-2013)의 서명이 있는 판화들은 그가 생전에 인종차별에 맞서 평생을 헌신한 평화주의적 이상을 담고 있다. 무한정 인쇄할 수 있는 판화지만 한정 수량으로 찍어내고 고유번호와 친필 서명으로 진품임을 증명한다. 그의 서사가 담긴 판화들은 세계 곳곳의 갤러리와 수집가들이 보유하고 있으며 작품당 한화로 약 500~1,000만 원 정도에 판매되고 있다. 희소성이 덜한 판화임에도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이유는 작품에 담긴 메시지와 더불어 작가의 삶에 대한 존중이 예술적 가치로 승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맥락과 서사. 태생적으로 AI는 앞서 말한 이 두 가지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 무한의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인간의 삶을 살거나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난 이 근본적 차이에서 인간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노(Suno)가 아무리 멋진 리듬의 재즈풍 음악을 만들어내도 결국 찾아 듣게 되는 건 1940년대 발매한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음반이거나, 챗GPT(ChatGPT)가 멋들어진 소설을 뚝딱 만들어내도 도서관에서 빌린 손 때 묻은 책 ‘그리스인 조르바’에 더 손이 많이 가게 되는 것이 분명 나만의 독특한 취향 때문만은 아닐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만들어내는 명작(Masterpiece)에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이야기들이 무수히 존재하며 분명 우리는 그것을 읽어내고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AI의 발전이 거듭될수록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그 잠재력의 희소성은 더욱 커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도태되는가 살아가는가
어찌 되었건 AI가 온 세상을 뒤덮는 시대의 흐름은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지도 쉽사리 예측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한 마음으로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때문에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 볼 때 경쟁은 답이 아니다. 이미 무한 경쟁의 시대를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이기에 굳이 AI까지 경쟁에 대상에 두고 승리를 거머쥐려 온 힘을 쏟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피곤하고 기계는 지치지 않는다. 결국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인간성(Humanism)의 회복과 고양이다. 인공지능의 의존을 줄이고 끊임없이 자신만의 철학과 이야기를 만들어 그 삶의 궤적을 결과물에 담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진법으로 모든 것을 계산하는 기계 따위는 범접할 수 없고 온전히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다채로운 인생의 기수법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당신과 나의 삶이 같지 않지만 누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듯이, 시대가 바뀌어도 우린 그렇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상투적이고 막연하지만 내가 찾은 해답은 정말 그뿐이다. 온전히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은 인공지능이 절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할 수 없는 AI에게는 조의를, 오늘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나와 당신의 인생에는 경의를 표하며 함께 희망의 앞날을 그려보자고 조용히 읊조려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