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참 오랜만에 쓴다. 요즘엔 글이 쉬이 써지지 않는다. 이 웹사이트는 나이를 먹을수록 희미하게 느껴지는 내 삶의 흔적을 어떻게든 남겨 보고자 간절한 마음으로 만든 공간이었다. 수많은 핑곗거리는 차치하고서라도 수개월간 새 글 없이 방치됨으로써 그 목적과는 되레 나의 존재감을 없어 보이게 하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고 있었으니 개인적으로는 뼈아프게 반성할 일이다.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든 글 하나를 올리겠다는 결심으로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을 여과 없이, 형식 없이, 두서없이 써 내려가 보기로 했다. 애초에 깜냥도 안되면서 멋들어진 글을 써보겠다고 펜대만 굴리다 아무것도 못하는 삼류 작가 흉내나 내고 있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겠지.
며칠 전부터 딸이 유치원 선생님이 불러줬다면서 악뮤의 ‘소문의 낙원’을 흥얼거린다. 그간 귀가 아리도록 들어야 했던 헌트릭스의 ‘Golden’과는 다르게 덜 자극적인 멜로디와 서정적인 노랫말 덕분인지 노래 실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닌 딸의 목소리로도 꽤나 좋게 들린다. 일곱 살 딸은 선생님이 그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에서 큰 영감을 받았던 것 같다. 자기도 그 노래를 잘 부르고 싶다면서 집에서도 차에서도 스트리밍 무한 반복을 요구하는 터에 나도 플레이리스트에 넣어 두고 한 번씩 들어보게 되었다. 글을 쓰며 노래를 듣던 중, 저 멀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착각이 들어 창문이 열려 있었는지 뒤를 돌아본다. 노래에 삽입된 샘플링이 평소 집 앞의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매우 닮아 있었던 것. 새삼 난 제법 좋은 곳에서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육아 마일리지를 성실히 쌓아온 덕에 최근 아주 긴 휴가를 얻게 되었다. 둘째의 출산 이후로는 이런 시간이 나에게 허락될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요 몇 달간 일과 육아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아보고자 나름 고군분투하고 있던 재택근무자의 짠한 모습에 아내가 내리는 포상휴가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럴 필요 없다.’는 진심과 가식이 반씩 섞인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려 열흘이나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머물기로 했던 것은 분명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터. 아마 나처럼 두 아이의 아빠거나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에 해당되는 이가 이 글을 읽는다면 무척이나 부러워할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역시 하나다. ‘결혼을 잘 해야 한다.’ 또 중요한 한 가지는 아내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내가 먼저 요구했더라면 이 시간은 절반으로 줄었거나 아예 없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묘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간극을 이해하며 살아야 나 같은 행운이 올 것이라는 말이다. 가장이여,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지만 희망은 여전히 있다.

아무튼 그런 아내의 배려와 희생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시간을 절대 허투루 보낼 수는 없는 일. 나는 최대한의 호사를 누려보기로 한다. 장대한 계획이라도 있을 것 같지만 사실 별거 없다. 잠을 10시간 이상 끊김 없이 자는 것, 다달이 나가는 돈이 아까워 끊으려고 고민했던 넷플릭스의 시리즈를 정주행 하는 것, 하루 식사를 한 끼에 몰아서 해치우는 것, 그 한 끼를 맥도날드에서 포장해 오는 것 등이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소박해서 한심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일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사치스럽고도 간절했을 일이다. 쿼터 파운더 치즈 버거를 최대한 게걸스럽게 욱여넣으며 TV 앞에 앉아 있으니 꿈에 그리던 한량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잠깐이지만 엄청난 쾌감이 몰려온다. TV에서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선택한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가 몇 편째 끊김 없이 재생되고 있다. 다수의 인생과 맞닿아 있는 일상의 소재로 드라마를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 황동만(구교환 분)의 처절하면서도 솔직 담백한 캐릭터와 서사가 나의 인생을 대변하는 것 같아 큰 몰입감을 선사한다. 물론 내 인생의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변은아(고윤정 분) 같은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캐릭터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말이다.

며칠 전, 오랜 지인들과의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10년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이 모임은 다들 각자의 영역에서 바쁘게 지내는 탓에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지만 운이 좋게도 나의 휴가 시작과 맞물려 모임이 성사되었다. 모임의 구성원을 소개하자면 대략 이러하다. 첫 번째는 성실하고 반듯하게 살아온 덕에 굴지의 대기업에 들어가 많은 이들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과중한 업무가 지향하는 삶의 균형과 괴리를 일으켜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동생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자신의 인생을 바친 대가가 충분하지 못해 노조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며 술잔을 들이켰다. 또 한 명은 공인 회계사이면서도 제법 큰 회계법인을 운영하고 있는 사업가로서 자신의 화려한 커리어를 바탕으로 큰 재력을 갖게 되었으며 슈퍼카를 몰고 명품을 몸에 두르며 많은 이들이 바라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 30대 후반의 돌싱남 동생이다. 다만, 최근 새로 시작했던 사랑에 실패했다며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또 한 잔의 쓴 술을 함께 들이켜야 했다는 것은 조금 안타까웠다. 마지막 한 명은 흔히 말하는 금수저 출신의 동갑내기 친구로 부모님이 꽤 유명한 지역 유지라 큰 걱정 없이 자라온 것으로 보이지만, 그 부모님의 강한 빛이 만들어 낸 그늘에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기에 아직도 훨훨 날아오르고 싶어 하는 꿈을 포기하지 못한 이상주의자이자 아이 셋을 둔 가장이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그다지 내 새울 것 없는 평범한 시골살이 중년에 불과해 보일 뿐이다.
시작점도 다르고 현재의 삶도 완전히 다른 네 명의 청, 중년이 모이는 자리는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지난날의 이야기로 웃고 떠들면서도 한 번씩 생겨버리는 정적은 서로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부리게 되는 오지랖과 이해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로 품는 의문이 밖으로 삐져나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만들어 낸 시간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삶에서 느껴지는 경외와 부러움은 그간 꺼내보기 두려워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스스로의 결여와 열등감을 다시 대면하게 만든다. 누군가는 갖지 못한 재력과 사회적 성공을 부러워하고 또 누군가는 행복한 가정과 안정적인 삶을 부러워한다. 함께 모인 네 명은 티를 내지 않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성과급을 제대로 받는 날이 온다면 크게 한 턱 쏘겠다는 동생의 자조 섞인 말에 나는 ‘도대체 얼마를 받으면 만족할 수 있겠냐’라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되묻는다. 또 누군가는 일보다 육아가 힘들다는 아빠들의 신세 한탄에 ‘왜 자기가 선택한 삶에 원초적인 불만을 토로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지면서도 숨길 수 없는 흐뭇함이 드러난 표정을 보며 앞만 보고 내달리는 스스로의 삶이 이대로도 괜찮은가 다시금 돌아본다. 이 모임은 그래서 가치가 있다.

모임 후, 나도 어지간히 들떴었나 보다. 자리를 파하면서 장모님께 가져다 드릴 꽃을 사기 위해 들른 꽃 가게에서 함께 있던 모임 친구들에게도 꽃을 한 다발씩 쥐여 준 걸 보면 말이다. 그간 거의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집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두문불출했던 터라 모처럼 자유로운 상태로 대도시에 나와 오랜 지인들과 여러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은 정말로 좋게 느껴졌다. 이별의 아픔이 채 가시지도 않아 힘들어하던 동생에게도 꽃다발을 쥐어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아주 가끔이지만 지인들을 통해 내 글에 대한 의견을 듣곤 한다. 글의 내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하나같이 들었던 말은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대단해 보인다’라는 것.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를 쓴 적이 있었을 테고, 진심을 다해 적은 편지를 한 번씩은 주고받은 적이 있었을 텐데 새삼 그들이 느끼는 ‘대단함’은 무엇이었을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건 아마도 철이 든다는 것.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는 것에 인색해지는 것.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게 되는 것. 힘들고 지쳐도 자신이 가고 있는 인생이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것. 그렇게 감내하는 삶이 어른스럽고 성숙하다고 여기는 것. 때문에 그들이 느끼는 ‘대단함’은 나보다 어른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이 되찾고 싶은 동심이자 잠시 머물러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은 진정한 휴식에 대한 갈망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두서없이 써진 글의 마무리를 일곱 살 딸이 흥얼거렸던 그 노랫말로 하는 것이 그럴듯 해 보인다.
‘지치고 병든 나그네여. 우 외톨이 나그네여. 당신의 불치병은 그곳에 존재할 수 없어요. 느리게 오래 걸어가요. 우 소문의 낙원으로.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왔어요.’
